Nov. 2019/ 문신 선생님이 말하는 신생공간과 오늘날의 조각 / 홍기하

어느 날 늦은 새벽, 작업실에서 홀로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나에게 가까워지며 점차 구체적인 형상을 빚어냈는데… 이는 바로 조각가 문신(1923- 1995) 선생님의 혼령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처음에는 혼비백산이 되었지만, 선생님은 사진으로만 보던 온화하고 옅은 미소와 함께 당황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키셨고 계속하던 작업이나 이어 나가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선생님 앞에서 작업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나는 이내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황급히 자리를 정리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대화가 오고 갔으나, 문득 이 귀한 자리가 중요한 사료로 남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녹음기를 켰다. 이하 문신 선생님과 나눈 대화의 녹취록이다.


홍기하(이하 ‘홍’): 선생님,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찾아오셨습니까?

문신(이하 ‘문’): 하늘에 편히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내가 내 고향 마산에 있는 문신미술관을 94년도에 개관하고 그다음 해에 죽었는데, 누가 보면 저 노친네 원하는 거 다 이루고 떠났구나 할 거야.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실은 난 화병이 나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어. 마산시에서 미술관 주변에 아파트를 짓는다느니 뭘 한다느니 아주 말도 안 되는 짓거리들을 하도 많이 해서 내가 그놈들 꼴 보기 싫어서 이 세상을 떴어. 그런데 내가 없으니깐 아주 더 신나서 고층 건물 잔뜩 세우고 경관을 다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고 하는데 그냥 하늘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있겠어? 하여튼, 이런저런 일로 세상 돌아가는 거를 둘러보다 보니 또 지금 세상 예술가들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작업실도 가끔 이렇게 돌아다니지.

홍: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으셨군요. 돌아가신 이후로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시나요?

문: 물론이지. 작업하는 풍경만 봐도 참 많이 달라졌어. 여기도 조각을 하는 곳이라서 하는 말인데, 나 때는 조각가들이 자기 작품이랑 대결하듯이 극한 노동력과 정신력을 요하는 조각들을 했어. 그래서 나는 작업을 매일같이 했지만 가장 기력이 넘치던 때도 힘에 부쳐서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은 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 그런데 요즘 작업실에서는 어째서 그런 대결의 풍경을 볼 수 없는 건가?

홍: ‘대결’이요?

문: 풀어서 말하자면 작업과 씨름을 하는 태도랄까. 조각을 하다 보면 마치 내가 다루는 이 재료와 연애를 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석고는 가녀리고 예민한 여인과 같고, 흑단은 자존심이 세고 강단 있는 여장부 같아서 각각의 묘미가 있는데, 이러한 성격에 따라 내가 조각을 하는 태도도 달리해야 하고, 그것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점을 존중하고 이를 북돋아 주는 것이 조각가로서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인간이랑 연애하는 것과 같이, 그 과정이 좋게만 흘러갈 수는 없는 법이라서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고 다툼으로 관계가 더욱 성장하기도 하잖아. 그래서 조각을 하다 보면 이것이 말을 안 들어서 막 내 마음대로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아. 류인(1)이 알지? 그놈 성격 보통 아닌 거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고. 걔는 작업할 때 신경질 나면 폴리를 그냥 맨손으로 퍼다 바르고 그랬어. 정신 나간 놈…

홍: 그쵸. 그렇게 재료랑 사투하지 않았으면 그런 조각들이 안 나왔을 것 같고, 선생님 연배의 모더니즘 조각가들은 재료랑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조각에서 느껴져요.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지 않으냐고 물으신다면, 일단 선생님 때는 주로 돌이나 브론즈같이 힘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들을 다뤘는데, 지금은 그렇지만은 않잖아요. 지금 젊은 세대는 재료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본인이 다루기 쉬운 재료를 선택하는 것 같아요. 저도 비교적 힘들지 않고 돈도 덜 드는 재료를 선택하려고 해요. 물론 돌이나 나무 조각만의 간지는 분명 다른 재료로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문: 여자라면 이해는 가. 내 생전에 불란서에서 조각 심포지엄에 나갔을 때 여류 조각가들이 몇 톤이나 되는 재료를 가지고 해보겠다고는 하는데 안 되니깐 다른 조각가들 손을 빌려서 하는데, 그 모습에 나는 동…

홍: 선생님, 잠시만요. 요즘은 그런 발언 위험해요. 선생님도 지켜보셔서 아시겠지만, 세상이 근래에 많이 바뀌었어요.

문: 아, 맞다. 그렇지. 세상이 참 변했어. 미술계도 다 홀랑 뒤집혔던데. 그때 걸린 그 사람들 다 어디서 뭐 하고 있나 몰라. 어쨌든 그 조각 심포지엄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당시를 떠올려보면 나를 비롯한 모든 작가가 정말 후대에 자랑스럽게 남길 수 있는 걸작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야외의 땡볕 아래에서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열정을 모두가 경험했어. 그런데 요즘 내가 떠돌다 보면 작업실에 있는 친구들은 그런 느낌이 아니야. 늙은이가 괜히 젊은이들한테 훈계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겠는데, 우리 사이니깐 그냥 편하고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왜인지 모르게 젊은 친구들한테서는 그 뜨거움이 안 느껴진단 말이지. 그 밀레니엄인가 밀레니얼 세대가 부모에게 과잉 칭찬을 받고 자라서 자기가 특별하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 커서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절망하면서 기대를 감소시킨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 건가.

 홍: 그건 도대체 어디서 들으신 얘긴지 모르겠지만 저희 세대를 너무 싸잡아서 이상하게 일반화시키는 것 같아요. 밀레니얼 세대 중에 얼마나 위대한 사람들이…

 문: 그건 말 그대로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고. 나도 다 봤단다. 너희 부모님은 네가 별생각 없이 만든, 아직 철이 하나도 안 든 생각을 담은 미성숙한 작품까지도 일일이 열심히 봐주시고 우리 딸 다 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고, 너는 마음 한편에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래 난 잘 컸어.’ 하면서 자의식을 느끼는 것을. 그러면서 작업하다 뭐라도 하나 잘 안 풀리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혼자 쇼를 하더라.

홍: (…!) 도대체 저를 언제부터 지켜 봐오신 거죠?

문: 나는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어.

홍: 그래도 저나 저희 세대에 대한 오해가 크신 것 같아요. 선생님 때와 지금은 예술의 사회적 위치나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모더니즘 작가들을 공부하다 보면 그들은 뭔가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예술을 위해 살고 죽으려 했던 것 같아요. 일단 선생님만 봐도, 제가 문신미술관 갔다가 선생님 묘비에 쓰여 있는 문구를 보고 정말 감탄을 했어요. 나는 노예처럼… 정확히 뭐였더라?

문: ‘나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나는 서민과 함께 생활하고, 나는 신처럼 창조한다.’(2)라고 쓰여 있지.

홍: 그러니깐요. 저는 그걸 보면서 진짜 대단한 에고를 가진 자였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요즘 시대에 어느 예술가가 자기 자신을 신이랑 동일시해… 최소 카니예 웨스트(3) 아니고서야. 그리고 ‘노예처럼’ 작업을 한다는 마인드도 참 신기했어요. 난 노예처럼 살기는 싫은데. 그럼 내가 미술가로서 자질이 부족한가 싶기도 하고.

문: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분위기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네 시선에선 내 묘비명이 이상하겠지만, 나의 동료 작가들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신념을 가지고 살았을 거야 

홍: 물론 자기 열정에 헌신하는 자세는 본받아야지만,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면서도 작업의 끈을 놓지 않은 몇몇 예술가들을 보면 솔직히 이해는 안 가요. 예를 들어서 저는 권진규(4) 조각가를 정말 존경하지만, 그의 재능, 감각, 의지, 열정, 명예를 제가 다 가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생애는 절대 살고 싶지 않아요. 예술이 뭐라고 거기에 전부를 희생하나요? 예술은 그렇게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도 아니고, 예술가도 그렇게 특별하거나 대단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도 없을뿐더러, 예술 활동으로 돈을 버는 것조차 너무나도 어려워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어떤 거대한 열망이나 선생님이 말씀하신 ‘뜨거움’을 안고 한다기보다는 가볍게 즐기는 마음으로 미술을 하는 거 아닐까요? 또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뜨거움은 너무 육체적인 부분에만 치우치지 않았나 싶고요. 지금의 조각가들은 몸을 덜 쓴다뿐이지 충분히 예술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어찌 보면 요즘 친구들은 김종영(5) 선생의 ‘유희삼매(遊戱三昧)’(6) 정신과 맞닿아 있는 것 아닌가 싶어. 나나 국광이(7) 같은 경우는 조금 자신을 괴롭히면서 작업을 한 경향이 있지만, 김종영 선생은 크게 힘을 들이지는 않으면서도 성실하고 진중하게, 그리고 고요하게 작업을 하셨지. 마치 승려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할까.

홍: 저도 김종영 선생님의 조각과 철학을 좋아하고, 말씀하신 대로 굉장히 젠틀하신 분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김종영 미술관에 갔다가 읽은 글에서 조금 놀랐던 부분이 있었는데, 김종영 선생님이 브랑쿠시를 완전 디스 하셨더라고요. 브랑쿠시가 지성이 부족한 게 유감이라고…

문: 그 정도 비판이야 할 수 있지. 조각계에선 브랑쿠시를 너무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데 김종영 선생이 그렇게 말한 건 그때 조금 힘든 시기라서 거칠게 말한 것도 없지 않아 있어. 당시에 돈을 못 벌어서 가족 전체가 힘든 시기였지.

홍: 아니, 김종영 선생님 같은 분도 돈을 못 벌었다고요? 이거 봐요. 이러니깐 미술을 믿고 나갈 힘이 생기겠어요. 요즘 작가들이라고 더 잘 버는 것도 아니고.

문: 원래 미술가라는 직업은 내 친구가 언제 한 말처럼 실망도 없고, 절망도 없는 거야. 인간은 뱃속에서 하나의 핏덩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울부짖으면서 그날부터 전쟁과 같은 삶을 살기 시작하는 거지. 나도 그런 마음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리면서도 작업을 했어. 그런데 나 때보다는 미술로 먹고사는 게 한결 나아졌다고 보는데. 내가 그냥 떠도는 게 아니라 요즘 전시도 많이 챙겨봐서 힘들어 죽겠는데, 하여튼 기금을 통한 전시가 정말 많더라고. 작가도 기금을 받고 전시하고, 독립 공간들도 기금을 통해서 운영하고. 그런 기회가 우리 시대에는 흔치 않았어.

홍: 그렇다고 그게 근본적으로 생계를 해결하지는 못하죠. 작가가 기금을 받아봤자 전시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따져본다면 크게 남는 건 없어요. 그리고 한 작가가 매번 전시할 때마다 기금을 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공간도 마찬가지예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공간들은 기금이 없으면 오래 유지될 수 없을걸요. 그러다 보니 신생공간들은 사라지기 쉽고, 또 애초에 장기적으로 운영할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누군가 미술계에 봉사하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운영을 한다면 조금이나마 가능해질지는 몰라도… 아까 얘기했듯이 미술에 대한 믿음이나 기대가 많이 떨어진 시대에서는 힘들어 보여요.

문: 그런데도 그 소위 말하는 신생공간들은 계속해서 사라짐과 동시에 또 새로운 곳들이 생겨나던데? 이제는 이름 외우기도 힘들어.

홍: 그렇죠. 이건 저희가 했던 얘기랑 좀 다른 결의 이야기지만, ‘신생공간’으로 미술계에 널리 명명되고 인식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공간들, 그러니깐 2015년 《굿-즈》 전부터 존재했던 공간들…

문: 나도 알고 있어. 다락방, 거래소, 미연이, 전자회로…

홍: 음… 뭐 이름이 정확하진 않지만 그래도 잘 알고 계시네요. 어쨌든 그런 초기의 신생공간들은 제도권 미술계와는 관련이 없는, 제도권 밖에 있는 곳들로 시작을 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런 곳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다뤄지고, 그 공간들에 몸담았던 작가들도 국공립미술관과 메이저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게 되니깐 신생공간이 제도권과 더 이상 관련이 없을 수가 없게 되었죠. 저처럼 초기 신생공간 시기에 몸담지 않은 세대에게는 더욱이나 신생공간이라는 것이 제도권으로 가는 징검다리의 역할 같아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작용하고 있다고 봐요. 완벽한 미술계 안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닌. 전시 경력이 없고 기회가 많이 없는 학생/작가들에게는 첫 스테이지이자 자신의 작업을 주변에 알리고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공간이기도 하고요. 또한, 앞서 말했던 소위 1세대(?) 신생공간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이 ‘공간’이라는 게 뭐 직원 있고, 사업자 등록 하고, 비싼 간판 세우고 해야 하는 기존의 방식을 따르는 게 아니라, 그냥 SNS 계정 하나 파고 주소 올리면 되는 거였잖아요. 그러다 보니 공간을 만든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물리적 진입 장벽이 낮아져서 공간들이 생기기 더 쉬워지지 않았나 싶어요.

문: 내가 지켜보면서 느낀 바로는 현세대가 공통으로 느끼는 조급함도 작용하는 것 같은데, 그게 요즘 죄다 들고 다니는 그 손컴퓨터 때문일 거야. 손컴퓨터로 매일 쏟아지는 소식들을 접하니 자신을 남과 비교하기에 너무나도 수월한 시대이지. 누구는 이런 걸 하고 있는데, 누구는 벌써 저런 걸 했는데, 하면서 마음이 급급해지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실제로 데뷔 연령도 우리 때보다는 많이 낮아졌지. 수명은 계속 길어지고 있는데 말이야. 하여튼 젊은이들이 빨리 무언가를 선보이고자 하는 조급함을 가지는 것도 신생공간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는 이유에 일조한다고 생각해.

홍: 그런데 조급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좋은 자극이 되어서 스스로 채찍질을 하는 역할도 해요. 그리고 조급한 마음도 있겠지만, 미술계 모두가 공공기금으로 지원을 받고 전시를 하는 것을 지향하는 시스템 안에서 경쟁에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기금을 탈 수 있는 작가나 기획자는 한정되어 있고, 경력이 많거나 적거나 모두 같은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거기서 계속해서 ‘탈락’하는 사람들은 앉아서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야 할까요. 자기가 자기 전시를 할 공간이라도 만들어야죠.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의 신생공간들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네요.

문: 어떤 면이?

홍: 가장 처음의 신생공간들은 뭔가 펑크스러운 면이 있었다랄까… 그냥 거침없이 생겨나고, 거침없이 전시하고, 거침없이 사라지고. 각자의 색깔이 분명했고 공간의 위치, 형태, 전시의 결 등 여러모로 실험적이라고 느껴졌어요. 트위터로 띡 하고 한 줄로 전시 소식 알리고. 그런데 요즘 생겨나는 공간, 이것도 신생공간이라고 칭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생기는 공간들은 기성 갤러리나 지금의 대안공간과 다른 점이 별로 안 느껴져요. 뭔가 오피셜하게 웹사이트도 만들고, 문체도 딱딱하고, 그곳의 운영자나 전시하는 작가들도 어느 정도 이미 잘 알려진 사람들이고.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속성만 빼고는 1세대 신생공간과는 결이 많이 다르지 않나 싶어요.

문: 나는 공간들이 하도 뭐가 많아서 잘 모르겠지만, 공간에서 전시되는 조각에는 주목했어.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요즘의 공간에 조각도 영향을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너도 알다시피, 조각의 크기를 정하는 것은 바로 문의 크기잖아.

홍: 그쵸. 요즘 공간의 크기가 작아서 조각도 작다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문: 물론 그런 면도 있지. 전시 공간은 둘째 치고 작업실들이 다 크질 않은 데 만드는 조각이 클 수가 없지.

홍: 서울 땅값이 이 모양인데 어쩔 수 없는 거죠. 교외의 넓은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에서 작업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그러려면 또 차가 있어야 하고… 진짜 노답이에요.

문: 그러게, 참 요즘 작업들 하는 공간을 보면 가슴이 아파.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것은 전시를 하고 나서 그 금쪽같은 조각들을 다 버리는 풍경이야. 작업실로 도로 가져가는 경우는 많지 않더라고. 그런 면에서 생겼다가 반짝하고 사라지는 신생공간들과도 속성이 비슷하다고 느껴졌어.

홍: 뭐, 신생공간도 현실적인 조건들 때문에 사라지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애초에 장기적인 운영을 목표로 두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죠. 조각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입체 작품들을 보관해서 짊어지고 가려면 공간도 필요하고, 공간을 옮길 때 운송 비용도 들잖아요. 보관에 드는 부담이 작업을 오래 할 수 있다는 확신과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보다 크기 때문에 전시가 끝나면 그냥 버리는 것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작품 보관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일 수도 있죠. 또한, 선생님 말씀대로 요즘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이미지들이 넘쳐나는데, 그 이미지의 무더기 속에서도 새롭고 신선한 것을 제시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잖아요. 경력이 많지 않은 작가들에게는 느린 호흡으로 긴 주의 집중을 요하는 작업보다는 에너지가 반짝해 보여야 시선을 끌 수 있고, 또 그때의 호응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시를 이어 나갈 수 있는데, 이미 만든 것, 이미 지나간 것보다는 앞으로 새롭게 만들 것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작품 보관에 신경을 안 쓰지 않을까요. 그리고 뭐 팔릴 가능성이라도 있어야 보관하고 싶지, 안 그래도 콩알 만한 미술시장에 요즘같이 내구성 없는 재료를 쓰는 조각을 누가 사요?

문: 손컴퓨터 때문에 즉각적인 반응과 성공에 익숙해서 어떤 성취를 이루는 데 시간을 투자하는 의미를 찾기 힘들어하는 것이 아닐까.

홍: 그놈의 손컴퓨터… 왜 어른들은 모든 것을 컴퓨터 탓할까요?

문: 하긴, 그래도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비추면 조각만큼 비효율적인 게 없다는 것에는 동감한다.

홍: 효율적이진 않겠지만, 조각은 효율을 따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너무나도 비효율적이라서 아름다운 것이 아닐지. 그래서 선생님의 조각을 보면 항상 경이롭고 마음이 겸손해지게 되는 것 같아요.

문: 훗. 그나저나, 벌써 해가 밝고 있어. 나는 어서 하늘로 돌아가 봐야겠다. 작업 마무리 좀 해야 해서.

 홍: 거기서도 작업을 하신다는 말씀이세요? 정말 열정이 대단하시네요.

 문: 하늘이라고 여기랑 뭐 다를 줄 알아? 거긴 말도 안 되게 더 치열해. 브랑쿠시 선생은 이미 위에서 개인전을 312번이나 치렀어. 그 양반은 진짜 병인 것이 틀림없어.

 홍: 어쨌든 아쉽네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국내의 젊은 학생이나 작가 지망생에게 한마디만 남기시면 어떨까요?

문: 쉽게, 단시일에 성공하려는 생각 말라는 말로 전부이겠어. 서울에 와서 듣자니, 어느 작가가 큰 집을 지었다느니, 또는 굉장한 생활을 하고 있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 생활의 여유를 갖고 작품 재료를 풍족하게 쓰며 창작에 몰두하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내 아틀리에엔 꼭 필요한 가구 나부랭이밖엔 아무것도 없어.(8)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생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셨다. 너무나도 급작스럽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가 그토록 동경하던 문신 선생님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작업을 혼자 하다 보면 ‘이건 하늘에 계신 OOO 선생님이 절대 용납하실 수 없을 거야…’ 하며 종종 자신을 채찍질하거나 반성했지만, 그들도 이 시대를 살았다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무겁고, 느릿하고, 힘들고, 큰 조각은 더 이상 새롭게 탄생할 수 없는 것일까? 


  1. 류인(柳仁, 1956~1999). 한국의 조각가. 변형, 왜곡된 인체 조각을 통해 문명 비판적인 시각과 인간의 고독하고 소외된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2.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추산동의 문신미술관 야외 언덕에 위치한 문신의 묘에서 해당 묘비명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 1876~1957)가 생전에 남긴 글귀인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브랑쿠시는 루마니아 태생 프랑스의 조각가로, 모더니즘의 창시자 중 하나이자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조각가로 꼽힌다.

  3.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 1977~). 미국의 래퍼, 프로듀서, 패션 디자이너

  4. 권진규(權鎭圭, 1922~1973). 한국의 조각가. 근대 조각을 대표하는 조각가 중 하나로 고졸 양식의 조각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한국적 리얼리즘을 찾고자 하였다. 생활고와 고독감에 시달렸던 그는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고 쓰인 유서를 남기고 작업실에서 목을 매 숨졌다.

  5. 김종영(金鍾瑛, 1915~1982). 한국의 조각가. 한국의 순수초상을 개척한 조각가로 동양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하였다.

  6. 유희삼매(遊戱三昧). 즐겁게 놀고 장난하는 데 열중함. ① 부처의 경지에서 노닐며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음. ② 중생을 구제하는 데 전심함. ③ 예술 같은 것이 戟塵(극진)한 경지에 이름을 말함. 출처=조기형, 『한자성어 고전명언구 대사전 23000어』(서울: 이담북스, 2011), p.525.

  7. 전국광(全國光, 1946~1990). 한국의 조각가. 조각의 기본 요소인 ‘매스(mass)’를 자신이 싸워야 할 ‘적’으로 여긴 조각가로 매스의 내면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

  8. 마지막 문답은 문신의 실제 인터뷰에서 발췌하였다. 이구열, 「자연스러운 불균형의 조화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각’- 문신씨가 말하는 예술과 파리에서의 작업」, 『공간』, 1976. 10.

Previous
Previous

Aug. 2021/ “VANILLA WAS HERE“ / 이유성 Eusung Lee

Next
Next

Jun. 2019/ 박하사탕으로 알아보고 나서――하얀 마름모꼴 이후 Through Peppermint Candy――After the White Diamond / 콘노 유키 Yuki Ko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