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022/ 홍기하의 조각, 그 자체의 본성 / 이설희

홍기하의 조각, 그 자체의 본성

이설희(독립 큐레이터)

 

 

홍기하(b.1994)는 조각가로, 조각을 바라보는 동시대의 변화를 살핀다. 조각 매체 자체를 재료, 표현, 형상, 조형미 등을 통해 파고드는 작가에게 ‘모더니즘’적인 태도가 읽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는 모더니즘 예술이란 즉각적으로 인지 가능한 각 장르의 특성에 스스로를 한정해 그 존재의 의의를 증명하고자 한 예술임을 천명했다. 그에게 이러한 예술의 즉물성(literality)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매체의 특성을 파고드는 것이다. 물론 그린버그는 매체에서 완벽한 순수성이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지만, 그럼에도 각 매체가 그것의 영역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차원 공간에 물질로 구현된 볼륨의 구성체’인 조각은 태생적으로 현실로부터 분리가 불가능한 매체이므로, 고유한 영역의 세계에서 모더니즘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형식주의 모더니즘을 역설한 그린버그 또한 조각을 보다 ‘모던’하게 만들기 위한 해법을 제시했다. 바로 신체를 떠난 눈, 즉 실제 공간과 시간에서 벗어난 데카르트적 눈을 통해 본 ‘회화화’된 조각의 외양이다. 조각은 ‘시각적 일루전(optical illusion)’을 바탕으로 관람자가 불투명한 공간에 놓이지 않도록 하는 매체, 즉 실제 공간과 시간적 맥락을 외면해야만 했다.[1] 이는 조각의 투명성(transparency)과의 대면으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는 작품에 내재된 ‘개념적 핵심(conceptual core)’과 그것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형태의 일관성이다. 따라서,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관점에서 형태 간의 관계는 순수 형식에 시각을 집중한 산물인 것이다.

홍기하의 조각은 외형상 모더니즘의 형식미를 지니며, 작가는 태도적으로 조각가만의 “고유성”[2]을 인정한다. 그가 던지는 “이 시대의 조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작업의 화두가 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러한 실천을 통해 조각의 매체적 특성을 간파하고자 하는 것인가? 조각의 개념적 핵심을 찾는 것인가? 시각적 혹은 관념적으로 조각 내부로 침투 가능한 현상을 기대하는 것인가? 혹은 작가에서 작품, 그리고 관람자로 연결되는 끈을 유지하려는 것인가? 작품 자체의 특징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질문들이 모더니즘 비평을 맴돌았던 것처럼 홍기하의 실천에서도 매체 특정적 개념이 읽히는 유사 현상이 관찰되는데, 이는 매체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개념/철학적 사유의 매개가 된 것을 의미한다.

 

물질로서의 조각

홍기하의 작품에서 재료의 물성은 작품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는 주로 돌, 석고를 다루며, 재료의 특질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하는데, 재료를 하나의 모듈로 가공하여 다루기보다 재료의 물질적 특성 자체에 관심이 있다. 2019년 첫 그룹전 《박하사탕》(별관, 2019. 2. 7. - 2. 21.)에서 “돌보다 강력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다”는 작가의 언급은 조각을 ‘물질’ 자체로 읽으며, 이 재료의 물성에서 조각의 영원성을 견지하는 작가의 관점을 간접적으로 엿보게 한다. 작품이 물질적인 특징으로부터 고유한 성질을 유지하며 물리적 실체로 정의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대목인 것이다.

특히, 홍기하의 돌조각에서 재료의 밀도나 중량감 등의 물리적 특성은 작품 구성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일례로, 사암을 깎아 목재 팰릿 위에 올렸던 조각 <Vanilla>(2020), 경주/포천 화강암 및 살구빛 대리석으로 제작한 <Solo>(2021) 시리즈는 최소 높이가 170 센티미터로, 성인 평균 키에 웃도는 물질로서 제시된 조각이었다. 홍기하가 작업에서 돌을 사용한 기록은 2018년부터 발견되는데, 당시 작가는 흑요석으로 <Emily>(2018), <The Thinker>(2018)를, 대리석으로는 <Armature>(2019), <Tex>(2019)를, 화강암으로는 <Notus>(2018), <Head>(2019), <RIP Ya’ll>(2019)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러한 작품에서 재료는 작가의 계획대로 정제/가공되어 제시되었고, 물질의 특성과는 별개로 구성되는 듯했다. 다시 말해, 실질적으로 읽히는 형상은 물질로서의 재료보다 작가의 의도대로 완결된 작품 그 자체가 더 부각된 모습이었다.

2020년부터 홍기하의 돌조각에서는 가공된 장식적 요소를 찾아볼 수 없으며, 재료의 물성이 즉물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재료의 질감을 그대로 노출하고, 재료 자체의 힘을 통해 작품이 구축되도록 한다. 돌의 생산 지역, 종류에 따라 밀도, 볼륨, 성질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홍기하의 조각은 재료의 특성에 의해 구성이 결정되는 조각이라 할 수 있는데, 육중한 무게를 지닌 재료의 특성은 중력의 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힘의 균형을 가시화한다. 한편 작가는 작년부터 석고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에 대해 홍기하는 환경/물리/심리적으로 돌조각을 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실내에서 작업 가능한 석고로 섬세한 감각을 찾으려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3] 재료와 관계를 맺으며 물성을 탐구하고, 이러한 조형 연습을 기저로 형식미까지 확장해 나가는 데 석고만큼 적합한 재료는 없다는 것이다. 물질에 신체성이 담길 때 조각이 된다는 작가의 신념은, 물질 그 자체의 본성을 강조하며 ‘재료에 충실하기(truth to material)’를 통해 조각의 생명력을 찾아가는 데 있는 것이다.

 

형상으로서의 조각

홍기하는 조각가로서의 기본 실천인 깎고(彫) 덧붙이는(塑) 방식으로 조각을 만든다. 물론 제작 방식은 재료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작가는 “재료, 매스와 사투한 흔적이 느껴지는 아주 맛깔나는 조형성을 가진 조각을 마주했을 때만큼 인간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있는가”[4]라는 작가 스스로의 물음으로부터 조각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형미를 상상하며 깨달음의 순간을 갈구한다. 2020년부터 홍기하의 조각 전반을 관통하는 형식적 특성으로 볼륨의 탈각, 양감의 결여, 교차와 관통, 표면 처리의 대비, 면과 곡선, 구조와 덩어리, 불안과 균형감, 그리고 추상 형태의 변형을 꼽을 것이다.

이처럼 조각에 있어서 형태의 미학적 실험을 지속하는 홍기하에게 예술은 문자 그대로의 추상, 즉 순수한 정신의 울림 그 자체를 드러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조각의 전형적인 조형미를 찾는 그의 작업 결과물에서 형태를 덜어내는 실천이 목도된다. 즉 형식을 소거하는 미학이 발견되는 데, ‘정신성’을 구현하고자 형태를 감축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형태가 형태 외적인 주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홍기하에게는 형태를 규정짓는 ‘유기적/기하학적’의 이분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조각은 외계의 형태를 은유할 필요 없이 더욱 추상화될 가능성을 지니는 매체가 된다. 이러한 형태는 알 수 없는 힘으로부터 형태 그 자체로 나타난다.

이는 오직 조각가 홍기하 개인의 감수성, 직관에 의해 가능한 실천이다. 조각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형미, 그것은 매스와 중력과의 사투일 뿐만 아니라 완성 시점을 결정짓는 예술가의 주체적 선택, 작품의 개념적 핵심, 관람자의 시각적 일루전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 경험의 소산이다. 아울러 이는, ‘추상-창조(Abstraction-Creation)’의 등식으로 나아가며 작업의 외연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제가 된다. 작가가 언급하는 조각이란 “자본주의 사회 하에 가장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기 때문에 가장 큰 가치를 지니는 것”[5]이라는 결론에서 역설의 미학을 본다. 애초에 조각적 현현(顯現)이란 도달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속 가능한 역설을, 예술이 여전히 자체의 영역 내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본다.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이 그러했듯 조형미 연구가 가능한 공동체의 환생을 작가 홍기하는 꿈꾸고 있다. 


[1] Clement Greenberg, “Sculpture in Our Time,” Arts Magazine (June 1958), reprinted in Clement Greenberg: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ume 4: Modernism with a Vengeance 1957–1969, ed. John O’Bria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58.

[2] 홍기하는 인간만이 창조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에 조각가가 있다고 언급했다. 작가와의 인터뷰, 2022년 6월 5일, 춘천 예술소통공간 곳

[3] 윤정의, 홍기하 2인전 《조소의 즐거움》(청년예술청 화이트룸, 2022. 4. 26. - 4. 30.) 브로슈어. 조각가 윤정의와의 문답으로 구성된 글이다.

[4] 홍기하 개인전 《VANILLA II》(레인보우큐브, 2022. 7. 15. - 7. 31.) 텍스트. 작가가 자문자답하는 형식의 글로, 질문은 총 12개 – 이 시대의 조각이란 무엇인가? 왜 더 이상 크고 무거운 조각은 탄생하지 않는가? 우레탄폼은 조각인가? 스티로폼 이후에는 어떤 것이 조각의 주재료가 될 것인가? ‘조각가’는 누구를 지칭하며, 본인을 조각가라고 생각하는가? 모더니즘 시기보다 조각에 대해 더 진지할 수 있는 시대가 있는가? 건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멋진 조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노동이 개입된 조각은 그렇지 않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가? 조각이 ‘귀엽다’는 것은 칭찬인가 비하인가? 조각의 채색은 회화의 것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여성적’ 조각이란 무엇인가? 지금은 조각의 암흑기인가? – 로 구성된다.

[5] 홍기하 개인전 《VANILLA I》(프로젝트 스페이스 영등포, 2021. 1. 20. - 2. 7.) 전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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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2022/ 조소의 즐거움에 대하여 / 홍기하 윤정의